모처럼 한가하게 TV에서 보이는 뮤직프로그램이나 보고 있었는데, 눈에 거슬리는 꼬맹이 하나가 끼어들었다. 곱슬곱슬한 갈색 단발머리. 내 입장에서는 아마겟돈 만큼이나 끔찍한 대재앙, 마리안느였다. 오늘도 언제나처럼 나태한 표정으로,
"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 있으면 공부라도 해 두시지, 주인씨. 설마 고양이보다 멍청한 남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."
고양이라고 자각은 하고 있는 거냐!
"정체성을 명확히 해 두는 것은 존재로써 당연한 일이야. 그러니까…"
언제나처럼 왠지 멋진 대사를 날리는 고양이를 보고 있자니, 왠지 분하다. 그래서 마리안느의 말은 결국 자신을 도서관에 좀 데려다달라는 이야기였는데, 이 녀석과 함께 나가는 건 아무래도 싫다. 게다가 오랜만에 본, '도전! 뮤직탑'에서 '러브로리'가 나왔기 때문에도 더더욱 더.
"아이돌이나 좋아하고 있을 나이는 아니지 않나? 그러다간 학교에서 소위 말하는 왕따가 될 거다."
아니 니가 일년전에 저질러놓은 일 때문에 이미 학부에서 따돌림 받고 있거든요? 네? 앞을 가로막은 마리안느 녀석을 피해 요리조리 화면을 살펴보자, 트윈테일 머리를 한 두 어린애가 노래를 막 마치고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. 그나저나 저 염색은 정말 잘 되었단 말이지. 둘다 꼬마지만 키가 좀 더 작은쪽이 분홍색, 큰 쪽이 빨강인데, 선명한게 참 자연스럽다.
-안녕하세요, 팬 여러분님들? 저는 착한 어린이 나리에요.
-훗, 안녕, 난 미리…/ -저는 팬 여러분님들을 만나게 되서 너무너무 깁뻐요!
-야, 내 소개…/ -팬 여러분님들도 착한 나리를 좋아하지요?
-나도 말 좀…/ -착한 나리도 팬 여러분님들이 너므너므 좋아요!
그리고는 빨강, 그러니까 미리아가 분홍, 나리에게 다가가 화를 낸다. 그러면 바로 나리가 바로 헤드락을 걸어버린다. 비명을 지르는 걸 들어보면, 흉내만 내는 게 아니라 정말 온 힘을 다 해서 조르는 것 같다. 흠, 아프겠군. 누차 이야기하지만 난 어린아이 취향은 아닌데, 저러고 있는 걸 보면 참 귀여우니까 보는 거다.
"완전 개판이잖아."
저게 귀여운거다. 아무리 같은 꼬맹이라도 너랑은 하늘과 땅 차이지.
"흥."
마리안느는 코웃음을 치며 내 옆에 누웠다. 뭐 맘대로 하라지. 사회자가 싸우는(이라기보다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는) 둘을 말리며 능숙하게 진행한다.
-그럼 이어서 러브로리의 인기곡, 옵빠, 싸랑해를 들어보겠습니다.
그리고는 노래가 흘러나오는데, 역시나 마리안느가 태클을 걸어 왔다.
"뭐야 저게, 왜 한명밖에 노래 안 해? 저 분홍머리 혼자서."
그게 컨셉인것 같던데. 미리아는 보통 노래를 안 하니까.
"그럼 왜 그룹이냐! 하아, 시간낭비했어."
그래. 시간낭비지. 그래도 난 이런 시간낭비를 좋아한단다. 너같이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은나노 입자보다도 작은 녀석하고 놀아주는 것보다는 그래도 유익하다고 생각하는데.
"뭐야. 주인씨는 나와 같이 도서실에 가 지식을 쌓는 것보다 저런 이상한 애들이나 보고 있는 게 유익하다고 생각한단 말이지."
"아니 도서실에 가는게 문제가 아니라 너랑 함께하는게 문제다."
마리안느는 모처럼 그 나태한 포커페이스를 지우고 분한 얼굴을 지어보였다.
"불행이 있을 거다."
"야! 너 그거 취소 안해? 저번에 내가 당한 꼴을 생각하면, 아오!"
마리안느는 흥,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내 책상쪽으로 다가갔다. 언제나처럼 일방적으로 불행 선고를 하고는 창문으로 나갈 생각이겠지. 도대체 나가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. 마리안느는 내 말에 뒤돌아보다 TV를 보고 멈칫거렸다.
"음? 저거 개잖아. 옆에 있는 건…… 사람은 아닌데."
뭐, 어디 개가 있어? 마리안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'러브로리'가 나오는 TV가 나왔다. 마침, TV자막으로 내일 이 동네에서 열리는 콘서트 홍보가 나타났다. 돈을 주고 사 볼 정도는 아니라 난 그냥 포기했지만.
"콘서트."
마리안느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미소를 지었다. 내가 본 마리안느의 얼굴들 중에서도 가장 기분나쁘고 불길한 표정이었다.